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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깊이와 철학 : 네이버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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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문학 중에는 마치 통속소설처럼 술술 읽히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이런 경우 언제나 번역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니며 많은 경우 우리 독자들의 수용 능력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저자 박유정 박사님은 철학의 분야 중 해석학을 이 문학 독해에 요긴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우리에게 이미 친숙하거나 여전히 낯설게 남은 여러 작품들을 더 정확히, 때로 더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저자는 1장에서 인간 실존의 핵심으로도 보이는 "부조리"에 대해 여러 문학 고전을 인용하며 논합니다. 죽어서 지독한 썩은 냄새를 풍기며 주변을 실망시킨 조시마 수도사(신의 대리인으로 파악된)에 대해 집요하게 반대해 온 캐릭터 이반은 설령 자신이 그르고 신이 존재함(따라서 옳았음)이 판명되더라도(meme si. 영어로는 even if), 인간 부조리란 영원히 신에 대한 유효한 항변으로 기능할 것이라고 외칩니다. 마치 카인이 야훼를 향해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 당돌히 외치는 장면이 연상되기도 하죠. 저자는 이어 카뮈를 논하고, 비트겐슈타인의 언명 "해결이 아닌 해소"도 이 맥락에 배치합니다. 유창하고도 재미있습니다.
소위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은 1991년 소련 붕괴까지 한국에서도 공명, 추종자들을 많이 얻었던 철학적 입장입니다. 그 내용과 표현 양식은 당혹스러울 만큼 천편일률인데 물론 해당진영에서는 그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건강한 정신을 웅변하는 현실주의라 옹호하죠. 저자는 이런 인식론을 유물론이자 반영론(p69)으로 보고, 그 영향이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등 엘리트 스포츠에서 구 공산권이 석권하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했다는 다소 독특한 견해를 피력합니다. 하긴 이 책이 해석학 기반에서 쓰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문학과 철학의 만남이란 이런 분야를 한국 독서 대중에게 최초로 소개한 분은 고 박이문 박사입니다. 그가 쓴 어느 실존주의 배경 논고는 고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을 만큼 유명하며 이 책 p85 이하에서 자세히 분석됩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신 트렌드였던 포스트모더니즘에까지 관심을 보여 그의 철학 세계에 포섭하려 했는데 그보다 한참 후배인 (현상학 대가) 이남인 교수 같은 분이 냉랭한 반응을 보인 데 그친 태도와는 크게 대조됩니다. 여튼 그 핵심은, 문학은 가언이고 철학은 정언 양상이라는 종래의 이분법은 이제 그 기반을 크게 상실해 간다는 점입니다. 이 논의는 "과연 무엇이 진리의 영역인가?"에까지 연결됩니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왜 그 피조물인 세계는 이토록 부조리하며 정의롭지 못한가? 유산된 세계, 혹은 잘못 출산된 세상을 직시하는 데서 구토(p25)가 일고 실존주의의 그 방대한 논의가 출발점을 마련합니다. 이어 저자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로 논의를 옮기는데 특히 폴 베를렌을 두고 프랑스의 소월이라고 평가(p155)합니다. 온리 텍스트로 읽어도 그대로 노래가 되는 한국 현대시인은 확실히 소월밖에 없습니다.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 프랑스어 원문이 수록되었는데 저자의 제안에 따라 소리내어 읽어 보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작보다는 드뷔시의 곡이 배경에 깔린다는 전제 하에 Claire de (la) lune이 더 마음에 듭니다.
이어 역시 국어 교과서에 그 글이 실렸던 조동일 교수님 저 <철학사와 문학사...>가 분석되는데 생각해 보니 이 주제를 논할 때 과연 이 책도 빠질 수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p178에 재인용되는 "分을 넘어 (다시) 合의 시대로"라는 명제는 요즘 융합 통섭을 논하는 트렌드에 비추어 과연 시대를 앞서갔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책의 주제와도 잘 맞아떨어집니다. 저자는 조 교수님 글이 박 교수님이 비해 쉽게 읽힌다는 말씀을 하시지만 이는 두 분이 각각 선 지평과 입장이 다를 뿐 아니라 스타일의 문제를 당위의 차원으로 무리하게 치환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네요.
저자는 책 후반부에서 지드의 <전원 교향악>(작가론보다 작품론에 치중), 카뮈, 니체, 로맹 가리, <삼국연의>, 연출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어느순간 싹 잊혀진) 등을 논합니다. 저자의 풍부한 문학적 감수성이 논의의 주조를 이끌어가는 까닭에 독자는 감상문 구석구석에 잘 녹아든 해석학 지식을 덤으로 얻는 느낌이 듭니다. 또한 이 책은 박이문 조동일 두 거장, 천재에 입문하려는 독자에게 아주 유익한 가이드북 노릇을 해 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