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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 판매원 : 네이버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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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란포가 극찬했을 만합니다.
과거 고전들을 보면 충분히 긴 길이, 호흡 속에 깊이 있는 사색의 흔적을 담은 작품들이 많습니다. 바쁜 현대에 들어서는 저런 작품들을 더 이상 넉넉한 마음으로 음미하기 어려워하는 독자들이 늘어난 데다, 때마침 외계인 소재의 가벼운 SF물이 유행하여, 호시 신이치 같은 천재가 이런 장르를 창안할 수 있었겠습니다. 실린 작품들이 대부분 기발한 트릭이나 돈강법을 사용하는데, 이 짧은 분량에 이 정도 레벨의 기교를 쓸 수 있을 작가가 극히 드물겠으므로 이후 쇼트쇼트 장르가 그리 번성하지는 못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표제작인 <사색 판매원>부터 리뷰하자면, 역시 이 책에 실린 작품들 중 가장 기발하고 혁신적이었습니다. 상대의 액션 허점을 파고들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반전을 펼치는 건 p172의 <서부에 사는 남자>의 플롯과도 비슷하며, 예전 작가 로베르 토마의 <Double Jeu>하고도 닮은 데가 있습니다.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모든 생각의 수고를 끝내 버리기 위한 생각 기계, 그리고 모든 외판원들을 퇴치해 버리는 기계를 팔러 다니는 외판원... p425의 <신용 있는...>을 보면 우리는 최강의 창과 최강의 방패가 만났을 때 더 이상 그 결과를 궁금해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p184의 <하늘로 가는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럭스 권총>을 보면 역시 날카롭게 빛나는 아이디어가 매력입니다. 이 아이디어는 이후 007의 영화판에서 여러 번 쓰였는데 아마도 호시 신이치의 이 작품이 더 먼저일 듯합니다. <약점>도, 예를 들면 숀 코너리 주연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에서 본드의 소변 샘플을 얼굴에 뿌리자 그 막강한 맷집의 거한이 바로 뻗어 버리는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사람만한 독극물은 없다는 결론 속에 호시 신이치 특유의 염세주의가 드러납니다.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불능이지만 그렇다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에너지를 쏟기는 뭔가 망설여지는 상황들이 있는데 p18의 <비>가 그런 당혹스러움을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우주통신>은 생선회를 즐겨 먹는 일본인들 머리에서 나올 만한 작품이 분명합니다(생선회가 얼마나 잔인한 음식인가요, 알고보면). 소통이란 그래서 어려운 것이며 상대방은 내 메시지 중 생각지도 않던 지점에서 미칠 듯한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유토피아>에서 팰 행성의 주민들은 대단히 지혜로운데, 실제로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 혹은 시칠리아, 실론 섬의 주민들이 지난 역사에서 무수한 고초를 겪은 것도 다 저러지 못했던 이유에서였습니다. p205의 <안개 별에서>도 낙원에의 침입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착상입니다.
p54의 <증인>은 이 책에 실린 다른 작품들과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이른바 "개돼지(영화 <내부자들>")로 요약되는 대중의 어리석음을 신랄히 꼬집습니다. 환자를 고치는 건 의사의 소명인데 너무 잘 고쳐 놓으면 바로 그 고쳐 준 은인 입장에서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지 난감해질 수 있음을 우습게 포착한 p67의 <환자>도 좋았습니다. 시골 사람들도 "사는 낙"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사실 과거 일본 역사에서도 억압된 하층민들의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지배층이 그들의 무서운 일탈을 주기적으로 허용하곤 했었고 그게 p72의 <낙(樂)>에 표현된 듯합니다. p100의 <불만>은 한참 뒤에 나온 영화 <혹성탈출>이라든가, 심지어 <300>에서 에피알테스의 배신도 생각나게 합니다.
p109의 <신들의 예법>은 p230의 <우호 사절>과 발상이 닮았습니다. p120 <멋진 천체>에서 느껴지는 무력감은 p322의 <통신판매>, p421 <식사 전 수업>과 느낌이 비슷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대부분 문제는 과다 성욕을 통제하기 어려운 데서 터지기도 하는데 p130의 <섹스트라>가 이를 풍자합니다. p329의 <텔레비전 쇼>는 이런 문제가 과잉교정된 암울한 미래(성욕 부재로 후속 세대 재생산 불가능)를 그립니다.
지나치게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순수한 사람들은 도태되는 게 어쩌면 필연인데 p214의 <물소리>가 이 씁쓸한 주제를 잘 말하며, p237의 <반딧불>도 비슷합니다. p242의 <엇갈림>은 단편 분량인데 튜브(작품에서의 이름은 "슈터 서비스")를 통해 물품이 공급되는 건 조지 오웰의 <1984>에도 나옵니다. 이런 서비스는 튜브가 택배로 바뀌었다뿐 어느새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중인 편의라고 하겠습니다. 택배가 엇갈려서 소동이 나는 건 조여정, 클라라 주연 한국영화 <워킹걸(2015)>도 있죠.
<사랑의 열쇠>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적인 엽편인데 이렇게 마음이 잘 통하는 연인들은 잘 맺어질 자격이 있는 거겠죠? p275의 <잃어버린 표정>도 좋았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여성분은 얼굴도 예쁘지만 표정이 참 다채롭고 다이내믹한 분인데, 사람 표정이 다양하다는 건 그만큼 감성이 풍부하다는 겁니다. 이 작품은 그런 여성들에게 바치는 최상의 찬사인데 사람 표정 만들어내는 기계까지 등장하면 반칙이라는 것이니 역으로 자연스럽게 그런 표정들이 지어지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냐는 뜻이 되니 말입니다.
p298의 <악을 저주하자>는, 그럼 그 끔찍한 저주(그런 인형을 effigy라고 하죠)는 아무 죄 없는 누군가가 대신 받았다는 소리니 제발 생사람 잡는 멍청한 짓을 하지 말자는 교훈도 됩니다. p352의 <복수>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복수의 쓸모없음을 암시하는 좀 다른 메시지도 함께 담습니다.
p439의 <순교>는 사후세계의 메시지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썼는데 영화 <일루셔니스트>도 생각납니다. 죽음보다 죽음을 앞둔 공포가 더 무섭다는 게 p377의 <처형>인데 마지막 문장, 죽음이 마치 화려한 불꽃쇼처럼 표현된 대목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떤 독자에게라도, 책을 읽다가 지루해서 잠들 일은 아마 전혀 없을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