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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갚는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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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을읽고싶은소년 2023. 4. 6.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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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갚는 기술 : 네이버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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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레 드 발자크는 잘 알려진 대로 19세기 프랑스의 문호입니다. 이 작품은 제목이 "빚 갚는 기술"이지만 사실은 돈 떼어먹는 기술에 가깝습니다. 물론 남의 돈을 떼어먹자고 반사회적 탈법적 주장을 하는 건 아니며, 일부 악착같은 약탈적 돈놀이꾼들의 행태를 비판하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작품에 실린 여러 법칙(?), 노하우 같은 걸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상당 부분은 반어법으로 읽어 나가는 게 맞습니다.  

독일의 법학자 프리드리히 카를 폰 자비니는 자신의 시대에 독일 통합민법 제정 움직임에 대해 "아직 독일의 유치한 시민 질서 발달 수준으로 볼 때 무리"라며 비판한 적 있습니다. 그 비교 기준은 바로 이웃 프랑스였습니다. 이보다 조금 앞선 시대 나폴레옹 1세는 자신이 주도하여 만든 민법전을 가장 큰 업적으로 꼽았는데, 그만큼 프랑스는 자유로운 시민 주도의 경제 질서가 유럽 최고, 아니 어쩌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했던 것입니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시대 프랑스도 혁명과 전쟁의 혼란 중에서도 계속 번영을 이어갔으며 그 와중에 갖가지 계약상의 제도도 정교하게 발전했습니다. 이 책에 (반어적으로) 소개된 기기묘묘한 제도, 관행 들은 다 그 산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p57에 "법적 분위기가 좀 남다른 노르망디는 빼고"라는 말이 있는데(p69도 참조) 원래 브레타뉴, 노르망디는 중앙 집권 과정에서 각각의 이유로 가장 늦게 왕국에 합류한 지방들이며 근세 들어서도 내내 왕따 취급 받던 고장들이었고 프랑스 근대 문학 작품들에서도 이들을 향한 편견 가득한 표현이 자주 발견됩니다. 지금 발자크의 이 언급도 그 예 중 하나입니다.

p56에 보면 프레스크립시옹이란 말이 나오는데 영어의 프리스크립션도 법적인 면에선 뜻이 같습니다. 그만큼 선진 문물이 발달했던 프랑스 문화, 제도가 영국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런데 p46을 보면 이를 공소시효라고 하는데, 물론 형법상의 사기죄 고소 기간과 겹칠 경우가 많겠으나 프리스크립시옹은 원칙적으로 민사제도의 일종입니다. p59에 보면 les cinq codes가 나오는데 나폴레옹 시대에 완성된 5개 기본 법전(민법, 민사소송법, 상법, 형사소송법, 형법)을 일컫습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다섯 개 법전이라는 뜻이죠. 저 중 민법을 프랑스어로 드루아 시빌(droit civil)이라 하죠.

p43에 나오는 빚의 다양한 범주는 법적인 규정이 아니라 (바로 위에 나오듯) 삼촌 앙페제 남작이 장난스럽게 만든 익살스러운 정의입니다. 세상에, 재산이 적극재산, 소극재산(=빚)이 있다는 구분은 들어 봤어도, 빚이 적극 빚, 소극 빚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봤습니다. 적극 빚은 책에 나오는 대로 그냥 우리가 아는 빚이고, 소극 빚은 빚의 반대이니 ㅋ 그냥 지 재산이라는 소립니다. 책에도 나오지만 마치 기존 외상값이 없는 양 새로 외상을 또 달아먹는다는 건데 이건 주인이 나한테 기부한 걸로 친다는 뜻이죠. p45에 보면 4분기가 가능해진다면 3분기까지는 받았다는 뜻이라는 것도 ㅋㅋ날강도 같은 억지입니다(p103에는 여러분의 월세 납부만 눈빠지게 기다리는 집주인 말고 풍요로운 사람을 찾으라는 말도 나옵니다). 이렇게 해서 빚을 떼어먹는다는 건데 말도안되는 이런 익살을 읽고 당대 프랑스 시민들이 얼마나 웃었을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합니다.

라틴어 어구 debitum quot annis에서 annis는 annus의 탈격입니다. 즉 "몇(quot) 년들(annis)으로부터 생성된"이란 뜻이겠습니다. 우리 고조선 시대에도 8조법금이 있었고 아마도 채무불이행자에 대해 적정한 규율이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로마 시대 12표법은 채무자의 신체를 찢어 채권자들에게 나눠줬다고 하며(p75), 한참 후 쥘 세자르라는 너그러운 정치가가 나타나서 채무자들에 대한 가혹한 처사를 지양하는 여러 배려를 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발자크의 본마음이 잠시 드러났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사회적 약자들일 채무자에게 근대 프랑스 법제가 너무 가혹하지 않냐는 거죠. p121에 보면 신체속박형에 대한 기술이 자세히 나옵니다.

그러나 p63의 "채권자에게 빚을 갚는 건 채권자를 동상처럼 쓸모없게 만들며, 상업 자체를 말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같은 문장은 그냥 명백한 유머입니다. 남의 돈을 떼어먹는다니,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서는 안 되죠. 채무자는 번 돈을 빚 갚느라 다 써버려 의욕을 잃고, 꼬박꼬박 빚이 들어오면 채권자가 일을 안 하고 팽팽 놀아서 상업이 마비된다는 소리니... ㅋ 참고로 쥘 세자르는 (각주에 나오듯이)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율리우스 카이사르입니다.

p110에 가르송garçon이 웨이터란 뜻이라고 나오는데 맞지만 이게 우리가 아는 boy이죠. 혹은 일본 의류 브랜드 comme des garçons 할 때 그 단어입니다. p93에 보면 세들어 살 건물 수위하고 친해 놓으라는 충고(물론 유머)도 있는데 영화 <굿펠라스>에서 깡패들이 우체부를 두들겨패는 장면이 생각나서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p84에 보면 채무자가 갖춰야 할 자질이 나오는데 채권자만큼의 기억력, 지구력, 꺾이지않는 용기, 간병인만큼의 참을성 등이 나오는데 그야말로 뒤집어집니다. p147에 보면 밀턴, 루소, 세르반테스 등 천재들은 빚을 하나도 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게 그만큼 건실해서 빚을 안 졌다는 게 아니라 요령이 뛰어나서 빚을 요리조리 잘 떠넘겼다는 뜻이라면 아마 발자크 본인의 희망사항이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