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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작가는 1980년대풍 통속 소설도 재미있게 잘 쓰시고, 이런 책을 보면 구도자 같은 면도 물씬 풍깁니다. 아니 그는 이미 구도자입니다. 이미 1990년대부터 그는 세계 각지를 찾아다니며 머나먼 이방으로부터 배운 그윽한 도를 국내 독자들에게 전하는 듯했습니다. "나는 본래 길이었으며 바람이었다." 똑같이 칠팔십 년을 살다 가면서 왜 우리들 대부분은 삶의 비의와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흙으로 화하는지 어찌보면 필멸보다 무명 무지가 더 서럽습니다.
"히말라야 사람들은 만트라가 의심, 불안, 고독, 욕망 따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갑옷이라고 믿습니다(p57)." 히말라야 인들과 달리 우리는 만트라 같은 갑옷을 찾기는커녕, 의심과 불안이 우리를 잡아먹도록 오히려 부추기며, 속물스럽게도 고독을 패션삼아 걸치고, 욕망의 노예가 됩니다. 형영상조(形影相弔). 몸과 그림자가 서로를 불쌍히 여긴다는 뚯이라고 합니다(p60). 이런 꼴사납고 치기어린 자기연민애서 죽을 때까지 못 벗어나는 게 인간입니다. 만트라는 "옴마니밧메훔(p206)"이라는 주언을 통해 일체의 번민과 고뇌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 마침내 해방되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만듭니다.
고산 등반에도 극지법이 있고 알파인 스타일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p62). 후자는 등로(登路)주의라고도 부르는데 도달한 높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셰르파의 도움을 안 받는다든가 남들이 안 가 본 경로를 애써 골라 목표에 이르는 그 과정을 훨씬 중요하게 친다고 합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한, 독일의 어느 문호의 말이 생각납니다. 존재의 나팔소리(p65)를 이런 끊임없는 도전과 극한체험을 통해 영혼의 귀에 들려 주는 게 선택된 극소수만의 행운이 되어서는 곤란한데, 이에 동참하려니 우리의 타락과 속물근성이 발목을 잡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p105)." 법구경에 이 말이 나온다는데 그래서 이 경전의 결론은 사람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긴 진정 행복한 사람은 키우는 화초 하나와도 백 년의 사연을 주고받으며 아예 내 안에서 나의 벗을 찾습니다. 어차피 내 맘대로 안 될 게 뻔한 타인과 뭐하러 가뜩이나 꼬인 연을 또 맺겠으며 업을 쌓겠습니까. 히말라야 길들은 이런 이유에서 대도(大道)라고 하시는데 내 맘 안의 묵은 때와 사악한 욕망을 말끔히 쓸어간다는 점에서 대도(大盜)이기도 합니다. p219를 보면 저자는 기독교 구약의 말씀, 태초에 있었다는 말씀 역시 길로 새겨 보자고 제안합니다.
광서장족(壯族)은 중국 안에서 소수민족 1위입니다. 몽골족 인구의 2.5배가 넘습니다. 티벳인을 뜻하는 장족(藏族)하고도 다르며 수효도 훨씬 많습니다. 아무리 중앙정부에서 동화정책을 편다 해도 여전히 그들은 민족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며 한족(漢族)과의 통혼에도 여전히 큰 거부감을 드러낸다고 합니다.그런데 탄압이나 회유보다 더 무서운 건 현대 자본주의가 불러온 급속한 물신제일 풍조라고도 합니다. 사람의 정견(正見)을 흐리고 폐(閉)하는.
이승의 삶이란 번개가 번쩍이는 그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부처는 말했습니다(p168). 그런 찰나의 삶을 더욱 초라하고 덧없게 만드는 게 우리네의 욕망이고 집착입니다. 참된 우리는 영혼이고 마음이지 온갖 비루한 욕망과 충동의 노예인 몸뚱아리가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티벳인들은 몸을 "자루"라고 부른다 합니다(p167). 죽으면 땅에 묻혀 썩어가는 빈 자루를 두고 왜 그렇게 요란을 떨어대며 숭배하고 만지려 들고 침을 흘리며 마침내 정복당하고 마는지, 차라리 슬프다고나 할까요.
"삶의 충만감은 물질세계의 만족으로 다 얻어낼 수 없다(p207)." 그래서 우리는 내면으로 계속 침잠하여 참된 나를 만나야 하며 그 결과 나라는 것도 아무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래의 내가 바람이었다면 봄날이 불러낸 참을 수 없는 충동이었다고 해도 상관없다(p216)."
"신은 나부끼는 바람 속에 있었다(p244)." 그러니 높은 산에서 불어오는 눈 냄새 나는 바람을 폐(p295)로 눈으로 맞고 있자면 저 신이라는 절대자조차 허무한 그림자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지구 반대편 이베리아 반도의 노란 화살표를 보며 저자는 내면의 신성(神性)을 다시 만납니다(p280). "나는 여전히 푸르렀고 내 영혼의 속살은 붉었다(p287)." 저자는 비로소 나를 좀먹는 암(癌)도 존재의 집 한구석 암(唵)일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죽을지 살지 모를 요즘이야말로 진짜 사는 맛이 난다(p305)." 독자도 덩달아 샇 맛이 나네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