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구미호뎐>의 대본집입니다. 여태 구미호를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들은 대부분 여성들이었는데 한혜숙, 송윤아, 고소영, 김태희 등 당대 톱스타 아니면 쉽게 맡지 못하는 배역이기도 했습니다. 특이하게도 이 드라마는 사람의 탈을 쓴 여우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명이 나오며, 메인 구미호도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습니다. 배우 이동욱씨가 그 역이었는데, 물론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좀 더 젊었을 때 출연했다면(=이런 매력적인 기획이 더 일찍 마련되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약간 들었습니다. 여튼 드라마 자체 세계관이 무척 촘촘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또 뭔가 슬픈, 참 재미있었던 컨텐츠였습니다.
이 드라마는 1회가 무척 충격적이었는데,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을 것 같던 가족이 알고 보니 어린 소녀(딸)만 빼고 모두 가짜였다는 거죠. 1회, 그것도 처음부터 시청자를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엄청난 트위스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지아가 저 어린 나이에 그 술수와 음모, 거짓을 한눈에 꿰뚫어본다는 게 신기해서 '아, 지아라는 애가 천재소녀인가 보다' 했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물론, 그런 꿈을 꾸고 난 직후라는 점도 감안해야 하죠 - 사실 저는 그 꿈 장면 교통사고에서도 엄청 놀랐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가족들이란 그들만의 독특한 분위기, 영혼에서 풍기는 개성이 뭔가 모르게 있기 마련입니다. 일본 추리소설에 자주 나오는 클리셰, "외모와 옷이 똑같지만 저 사람은 그가 아니에요!"라든가,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SF 호러 <인베이전 오브 바디 스내처>(혹은 <패컬티> 같은 것)에서와도 비슷하죠. 그 나이에는 가족밖에 없는데 가족이 다 페이크였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까. 이 소녀의 절망감은 화면 밖으로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 대본집 p20에 나오듯이, 저 시퀀스에서는 구미호 이연이 요사스러운 비주얼을 하고 갑자기 나타납니다. "오늘 본 건 모두 잊어라. 그렇지 않으면..." 이 역시 최고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드라마들은 이렇게 첫 화 인트로에서부터 사람 혼을 쏙 빼놓는 놀라운 재주를 피우는데, 그런 중에서도 단연 최고였습니다. 구미호 나오는 드라마 자체가 시청자들한테 구미호 짓을 한 셈입니다.
사실 지아는 머리가 좋은 애이기도 합니다. p44에 보면 "4백만원짜리 커스텀을 신고 악센트에 전남 영암이 없고(고향을 구라침)..." 이렇게 근거를 뚜렷이 갖고 사정을 판단, 통찰하지 않습니까? 이 점도 저는 예전에 TV로 볼 때 참 좋았던 게, 시청자도 뭔가 이상하다고 어렴풋하게 (잠재의식 단계에서) 느낄 때 그걸 확 들춰서 "사실 이거잖아!"라고 확 까발기는 게 굉장히 통쾌한 기분을 준단 말이죠. 여기서는 지아 캐릭터가 성인인 제 나이로 나오기 시작하는데 배우 조보아씨가 특유의 매력을 잘 표현하는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p85를 보면 이연(이동욱 扮)의 명대사 하나가 나오는데 "자고로 협박은 힘 있는 놈이 하는거야."가 그것입니다. 하긴 을의 위치에서 협박이 나올 수는 없고, 뭐 하나라도 무기가 있어야 같이 죽어 보자는 식으로 나올 수나 있죠. 이 이연 캐릭터가 나이가 엄청 많다 보니 저 대사 중 "자고(自古)로"라는 부사어가 좀 각별하게 들렸습니다. 한자 自라는 게 "~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인데, 예전부터 라는 뜻의 저 관용어가 나이 천 수백 살을 먹은 산신(山神)의 입에서 나오니 설득력이 다르지 않습니까. 외양이라는 게 정밀 기만적이라서, 속에는 세상 온갖 더러운 꼴 희한한 꼴 다 봐 온 백발 늙은이가 들어앉았는데도 겉모습이 저렇게 젊은이이니 사람들이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연은 일종의 츤데레 캐릭터이기까지 하니.
이 드라마는 2화에서 느닷 배경을 확 바꿔 어느 어촌으로 크루들이 들어갑니다. 이 점도 저한테는 의외였고 신선했는데요. 표면상으로는 방송국 일 때문에 이리 왔지만 남지아는 평생 숙원이던 부모님 찾기의 단서를 여기서 발견하려 듭니다. 여기서도 수수께끼의 뱃사람들, 마을 사람들이 마치 좀비처럼 달려들어 해코지를 시도하는 장면이 무척 무서웠습니다(^^;:). 이 대본집 p132~133에 해당합니다,
이연은 저세상에서 일종의 공무원 신분이기도 했는데 거기도 시스템이 돌아가려면 누군가가 공무(公務)를 맡아서 해야 하겠지요. 삼도천은 동양 개념인데 그리스 신화에도 스튁스라는 게 있기는 합니다. p198 같은 데 나오는 내세 출입국 사무소가 웃겼습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재미있는 설정이 나올 때마다 시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자막으로 정보를 알려 주는데 배니싱 현상이라는 게 있었죠(p208). 여기서의 현상과는 상관이 없지만, 형제 간의 미묘한 알력 관련해서 배니싱 트윈이라는 게 있습니다. 김범이 연기한 이랑 캐릭터는 물론 형과는 태어난 시점도 다르고 생모도 딴 사람이지만 여튼 세상(여럿을 넘나듭니다)에서 너하고 내가 공존하기 어렵다는 듯 티격태격하는 게(물론 속마음은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sibling rivalry의 한 전형을 보여 줍니다.
드라마를 볼 때 설정이 참 스케일이 크다고 느낀 게, 이게 단순한 전생환생물이 아니라, 전생 중의 한 파트로 돌아가서도 거기서 사람 몸 안에 여러 영혼이 넘나든다는 점입니다. 1회에서도 부모님 껍데기 안에 다른 무엇들이 들어 있었는데, 조선 시대 공주 이아음이 처해진 환경에서도 또 아빠인 왕의 몸에 이무기가 깃들었는가 하면(p266)... 급기야는 아음(곧 남지아) 자신조차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판으로 흘러간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전생물에 (변형) 엑소시즘이 마구 섞인 셈인데... 이게 스토리가 막 대책없다면 뭐가 뭔지도 모를 혼란이겠지만, 희한하게 시청자들을 하나하나 납득시키면서 진행하기 때문에 정신없으면서도 수긍을 하며 이야기에 빨려들어갑니다.
방금전까지 조선시대였으면서 능청스럽게 현대로 돌아와서는 배경이 이제 민속촌이며 한복들을 입고 있습니다. 드라마가 표현하는 멋진 유머 중의 하나입니다. p302에 해당하는 회차의 드라마 키스씬은 개인적으로 최고라고 생각했으며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스틸컷도 참 예쁘게 뽑혀 나왔습니다. 물론 배우들이 미남미녀인 덕도 있지만 그이상의 뭔가가 깃들었다고 할지.
이무기도 감정이란 게 있고 자신만의 딱한 사정이 있어서 저 난리를 치고 다닌다... 이 드라마에서는 각종 이무기 같은 빌런들도 구태여 악마화 타자화하지 않고, 심지어는 주인공 육신의 일부에까지 투입시켜 과연 정(正)과 사(邪)의 경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시청자들이 한 번 정도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이무기뿐 아니라 김범이 연기한 이랑 캐릭터는 과연 악연인지 선역인지 16화까지 내내 헷갈리지 않았습니까. p363을 보면 소년 이무기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인데 많이 불쌍하지 않습니까.
p422를 보면 이 드라마에서 참 매력적인 유머라 생각되던 장면이 대응하는데, 아음 공주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어명을 고하는 사내가 바로 "방송국 사장"인데 드라마를 봤던 시청자들은 배우가 그 사람이니까 실시간으로 웃음이 터졌겠지만 이 대본집만 보는 사람이라면 설명을 (바로 이 본문이 하듯) 따로 글로 해 줘야 알아들을 것입니다. 이 드라마는 방영 당시 워낙 화제작이었기에 넷상의 이런저런 커뮤에서 온갖 해석본(썰)이 다 돌아다녔지만 이 대본집은 그야말로 유권 해석을 내려준다고 하겠네요.('음, 그런 뜻이었군!')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