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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개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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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을읽고싶은소년 2023. 9. 7.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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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개발자들 - 예스24

흑백 사진으로부터 시작된 궁금증, 거대한 기계 앞에 서 있던 이름 없는 이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파헤치다! 저자 캐시 클라이먼이 마주한 유명한 에니악 사진 속 여성들은 아무리 봐도 단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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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악은 에드삭과 함께 최초창기 컴퓨터로 꼽히는 혁신적 전자 연산장치입니다. 이 책의 중심 사연으로부터 대략 20년 후의 일을 다룬 영화 <히든 피겨스>에도, 흑인이라서 차별 받고 여성이라서 무시 받았던 이들의 이야기가 담겼는데, 이 책도 그 공로에 비해 지나치게 평가절하당했고 심지어 의도적으로 왜곡당하기까지 한 여성 개발자들, 폄하되다가 마침내 "사라진" 인재들에 대한 안타까운 르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믈론 이 책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백인이긴 하다는 게 다릅니다만.


19세기 러시아에는 소피아 코발렙스카야라는 천재 여성 수학자가 있었습니다. 이분이 남긴 업적은 매우 많은데, 가장 유명한 건 가톨릭 광신도로도 잘 알려진 프랑스인 오귀스트 코시의 정리를 훨씬 일반화하여 편미분(partial differentiation)과 해석학(analysis) 분야에서 큰 도약을 이룬 것입니다. 이 정리는 널리 통계 검정이나 회귀분석에 이르기까지 안 쓰이는 데가 없고, 우리가 그 이름만 모른다뿐 생활 속에서 누리는 편의가 그에 크게 빚진 바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여섯 분의 여성 개발자들도, 명석한 두뇌를 타고났으며 학창 시절 우수한 성적을 올린 재원들이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국가의 부름에 응하여 각종 군사작전에 필요했던 전산작업 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올렸지만 그에 합당한 크레딧은 받지 못했습니다. 마치 소설 <작은 아씨들>처럼 흥미롭게 펼쳐지는 여섯 개발자들의 사연은, 그 범위가 꽃 같은 20대 시절부터 장년기까지 걸쳤기에 한 편의 서사시를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compute라는 동사는 본래 "계산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가 하필이면 EDPS를 간단히 지칭하는 그 명사형의 용법에 고정되는 통에 현재는 다른 뚯으로의 쓰임새가 무척 줄었습니다. p49에도 나오지만 컴퓨터라는 단어는 1860년대 마리아 미첼(이분도 여성 천문학자이며 위에 언급한 수학자 코발렙스카야와 활동 시기가 겹칩니다)가 쓴 그런 맥락에서의 "계산하는 사람"이란 뜻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정밀한 사고력을 자랑하는 사람을 한때 컴퓨터 같다고도 했는데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사람 직업을 두고 컴퓨터라 부른 시절이 더 길었다는 건 흥미롭습니다. 물론 20세기 말에는 PC의 보급이 늘어나면서 컴퓨터의 한계가 더 널리 인식되어 사람보고 컴퓨터 같다는 말이 오히려 흉 잡는 표현이 되기도 했습니다. AI가 더 발전하면 이 말의 뉘앙스가 다시 반전을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는 물론 여성 개발자, 공학자들만 나오는 건 아닙니다. 이들에게 큰 도윰을 주고 때로 결정적안 영감을 주었던 남성 학자들, 군인들(전시 경력이며, 본업은 공학자들입니다)도 눈부신 활약을 하며, 이들은 여성 인재에게서 있는 그대로의 재능을 평가하는 열린 마음을 가진 이들입니다. 본래 열등감 가득한 사람이, 경우에 맞지도 않은 이런저런 잣대를 원칙이라며 함부로 아무때나 들이대는 법입니다. p122를 보면 존 홀버턴, 허먼 골드스틴 같은 이들이 어떻게 에니악 개발의 초기 단계를 개척했는지 가슴 설레는 에피소드가 펼쳐집니다. 시작은 미미했으나 결과가 창대하리라는 기독교 성경 구절도 함께 떠오르네요. 

미국 영화를 보면 전보회사(우체국 기능이나 요즘의 택배 회사도 겸한) 웨스턴유니언이 자주 등장하는데, p160을 보면 진 제닝스(이 책 6인의 여성 주인공들 중 한 명입니다)에게 군 당국에서 채용 통보를 알리는 수단으로 언급됩니다. 미주리의 시골에 살던 그녀는 이제 한동안 사랑하는 가족, 특히 언제나 자신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시고 전폭적인 애정을 쏟던 아버지와 헤어지는 게 무척 아쉽습니다. 하지만 나만의 재능을 큰 무대에서 활짝 발휘하려면 떠나는 발걸음이 보다 단호해야 하겠습니다. 성공하는 이의 첫행보는 언제나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베티는 프로그래머가 되었다(p175)." 나중에 돌아보고서야 비로소 그 거인들의 시작도 이처럼 위태롭고 소박했었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그런 순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베티는 프랜시스 엘리자베스 스나이더를 가리킵니다. 캐슬린(=케이) 맥널티 역시 이후 "에니악에 대해서나, (갓 몸담게 된) IBM사의 장비에 대해서나 내가 아는 게 없었다"며 겸손하게 회고합니다. 출중한 업적 앞에서도 언사가 이처람 겸허한 데에서 그들의 인격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p180의 "베티는 무엇이든 잘 배웠다."라는 문장도 눈에 띕니다. 

"엉청나게 큰 것(p218)" 물론 에니악 장비를 가리킵니다. 당시에는 이 초기 컴퓨터가 엄청난 덩치를 자랑했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 사이즈에 비례하여 놀라운 성능이 나오는 줄만 알았을 겁니다. 지금 아무나 다 들고 다니는 보급형 스마트폰이라 해도 저 에니악에 대면 거의 슈퍼컴퓨터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큰 방을 가득 채웠고 검고 어두웠어요(p219)." 엘리자베스 스나이더의 소박하고 천진한 멘트입니다. 이 순간이 바로 드림팀의 판타지 크루가 다 한자리에 모이는 벅찬 장면입니다.


p248에 나오는 "차를 대접하는" 아델은 허먼 골드스틴의 아내입니다, 이분도 수학 석사 학위까지 지닌 여성 인재지요. 이분뿐 아니라 여섯 명의 주인공들도 (책에 나오듯이) 수학 실력이 출중했고 애초에 수학 마인드가 없으면 프로그래밍 일을 못합니다. 이 극초기 프로그램에도 디버깅 단계가 필요했다는 서술을 읽으니 예나 지금이나 이 일의 성격은 큰 차이가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베티와 진이 에니악 시동을 앞두고 설레어하는 천진한 모습을 보십시오. 여성 특유의 이런 순수한 열정이 (재능과 결합하여) 난제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한 대목이었습니다.

컴퓨터야 안 쓰이는 곳이 없는 도구이지만 특히 저무렵(1947)에는 전쟁이 끝난 직후라서 항공우주공학에서 이런저런 프로젝트가 많이 진행되었을 터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알듯 2차대전 직후에는 새로이 미소 양 진영에서 냉전이 시작될 시점이라 더더욱 저런 연구활동, 특히 풍동(風動) 프로젝트 같은 것이 탄도 연구소에서 발주되었을 것입니다. 방정식을 수학자들이 고안하면, 프로그래머들이 에니악을 돌려 최종값을 계산하는 것입니다. 진 제닝스는 여기서도 눈부신 활약을 보입니다.


책후반에는 6인의 약전(略傳)이 있고, 이 논픽션이 기댄 갖가지 서적, 논문, 저널 등의 출처가 나옵니다. 출판사에서 이 부분도 빼놓지 않고 다 실어 주는 성의를 보였네요. 재능의 후광 덕분인지 6인의 개발자 모습들이 실린 화보에서 다들 참 미인처럼 보입니다. 업적을 이루고 난 후의 환희가 얼굴들에 표현되어 더욱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책 앞표지에 마치 기록말살형이나 당하듯 개발자들의 얼굴이 찢긴 처리(물론 의도적 편집입니다)를 보니 좋은 대비를 이뤄 보는 독자의 마음이 더욱 씁쓸해집니다. 여성 야구선수들의 자랑스러운 활약을 다룬 영화 <그들만의 리그>가 떠오르기도 했네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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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개발자들

에니악은 에드삭과 함께 최초창기 컴퓨터로 꼽히는 혁신적 전자 연산장치입니다. 이 책의 중심 사연으로부터 대략 20년 후의 일을 다룬 영화 <히든 피겨스>에도, 흑인이라서 차별 받고 여성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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