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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인문학관 관장이자 건대 국문과 교수를 역임한 강인숙 박사는 몇 년 전 타계한 이어령 선생의 부인입니다. 이어령 선생의 취향, 성장 배경, 지적인 특징 등을 이분만큼 속속들이, 또 정확히 파악한 분은 없을 것입니다. 배우자로서 선생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했던 이점 외에도, 학창 시절을 같이 보낸 벗이었고 학자로서 상당 기간 같은 지점을 바라봤던 동료였기 때문입니다. 이어령 선생은 생전 많은 저서와 강연, 대담을 통해 개인으로서 자신을 대중과 독자에게 비교적 많이 공개하신 편이었지만, 강인숙 교수의 이 책을 읽어 보니 여태 독자로서 어렴풋이, 부정확하게 파악하던 바와는 매우 다른 면모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또 강인숙 박사님은 이어령 선생과 동갑입니다. 그렇게 연로하신데 명징한 문장으로 이처럼 자신의 견해와 기억을 서술할 수 있다는 자체가 놀라우며(단 모든 글이 최근에 쓰인 건 아닙니다), 당신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을 이런 귀중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 독자들과 공유해 주셨다는 점에 감사할 뿐입니다. 생전 선생의 책에서 유년기를 회고할 때는 묘하게도 결핍과 강박, 여유와 응석이 혼재한다는 느낌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 비로소 납득이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부친께서 지주로서 풍요를 누린 분이었으나 해방 후 토지개혁 와중에서 곤란을 겪었고 마침내 파산까지 갔다고 합니다. 또 부친이 새로운 반려자를 맞는 중에 비교적 이른 시기에 모친을 잃어야 했습니다. 선생의 회고에서 어머니만 언급되면 설움이 뜨겁게 밀려오는 듯한 어조였던 것도 다 이 때문이었던것이죠.
선생은 모르는 게 없었던 폴리매스에 가까웠고 그래서 강 교수는 그를 초급수학보다 미적분을 더 잘 했던 기재로 기억합니다. 그러셨으려니 생각되긴 하지만 사실 그게 어떤 경지를 가리키는 건지는 잘 이해가 되진 않았습니다. 미적분은 본래 수를 다루는 테크닉으로는 그리 어렵지 않고, 물리 현상에 적용하여 그 의미를 캐는 과정이 까다로울 뿐입니다. 추상 사고에 그분만큼 능한 한국인이 없었다고도 평가하시는데 그래서 우리 독자들이 그를 특별히 존경하고 감탄했던 것입니다.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그를 현란한 언술로 기만과 현혹에 능했다고도 하지만 그렇게 볼 것 같으면 애초에 인문 자체를 부정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어령 선생이 서울대 국문과를 다닐 때 일석 이희승이라는 국어학계의 태두가 학생들을 지도했었습니다. 이어령 선생보다 한 살이 많은, 동아일보 논설위원이자 소설가였던 고 최일남씨도 그의 제자였습니다. 일석 이희승은 꽤 단신이었다고 하는데 최일남씨도 단신이어서 학생 시절 교수님의 뒤를 몰래 따르며 누가 더 키가 큰지 재어봤다고 하는 재미있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역시 서울대 국문과 출신인 강 박사는 이 책에서 "스승보다 나은 제자"라며 청년 이어령을 칭찬했던 일석을 회고(p47)합니다.
강 박사는 남편 이어령을 가리켜 네오필리아였다고도 규정합니다. 선생은 물리적으로도 새 것을 좋아하고 기꺼이 채용하던, 요즘 말로 하면 어얼리 어댑터였겠는데, 실제로 1980년대 중반에 벌써 워드프로세서를 써서 원고 작업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부인이 회고하시는 선생은, 새롭고 낯선 지식이나 사고 방식을 기꺼이 먼저 채택하던 개척자, 파이오니어로서의 네오필리아입니다. 선생은 노령에 접어들어서도 사조(思潮)와 테크놀로지의 첨단을 수용했을 뿐 아니라 이를 사랑하여 그 장점을 누구보다 진정성있게 옹호 설파하기도 한 분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1933년생인 선생이 가정에서는 어떻게 배우자를 대하셨을까 하는 점었습니다. 역시 최고 엘리트답게 동년배들이 가지는 터무니없는 권위의식이나 남성우월주의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습니다. 또 니체가 말한 이른바 intelle integrity의 표본처럼 언행일치의 화신이며 어설픈 술수나 잔머리를 지성으로 착각하는 비천함과는 아주 거리가 먼 분이기도 하죠. 일부 비뚤어진 참칭 페미니스트들(선생보다 한참 어린)의 리버스 가부장주의 같은 한심한 행태를 보면 절로 한숨이 나올 뿐입니다. 우리가 고전을 통해 만난 괴테, 헤겔, 위고, 톨스토이, 졸라 같은 비현실적인 인격자 비슷한 분이 혹시 한국에 있다면 바로 그분이 이어령 선생 아닐까 생각합니다. 강 박사와 이어령 선생의 학창 시절 로맨스에 대해서는 책 p114 이하에 나옵니다.
p212를 보면 그 이른 시기에 이상(=김해경)을 분석했던 선생, 그리고 우리들이 친일파 연구자로 잘 아는 임종국의 이름이 나옵니다(물론 이상에 대한 분석 성과로). 그러고 보니 임종국 선생도 이어령 박사와 비슷한 또래이긴 합니다(학교는 다르지만). 이어령 선생은 1980년대 거의 내내, 세 살 아래인 김윤식 서울대 교수 등과 함께 이상문학상 심사위원이기도 했습니다. 문학사상(잡지 혹은 출판사) 자체가 선생의 자식이니 당연하지만 말입니다. 하긴 선생의 연구가 아니었다면 공사판 노동자 생활도 했던 이상(일인 감독의 착오), 김해경이 오늘날처럼 천재 이미지로 널리 각인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부록으로 다른 친척분들의 이어령 선생에 대한 회고담들이 함께 실려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더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