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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기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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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을읽고싶은소년 2024. 10. 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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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기담집 : 네이버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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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포는 아직도 일본이 열심히 미국과 유럽을 따라배우던 시기 영미의 추리장르에 푹 빠져 아예 일본의 미스테리, 괴기 서브컬처 영토를 하나 창시한 거장입니다. 사실 요즘 눈으로 보면 란포는 장르의 당대 정격에 충실하여 성실한 모방을 행했다기보다, 아예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하나 만들었다고 보는 게 더 타한한데, 같은 시기 일본의 이런저런 다른 개척자들과는 달리 유독 한국에서도 열렬한 지지가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부커판 표지에는 한자로 그의 이름을 江戶川亂步라고, 디자인의 일부로 활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잞알려진 대로 그는 E A Poe를 흠모하여 필명을 저리 지었는데, 잘 뜯어 보니 그 이름에 든 뜻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의 문인들에게는 난(蘭)을 치고 시를 쓰는 게 마치 정원을 산보함과 같았는데, 그의 괴기한 픽션을 읽다 보면 그 그로테스크하고 고어한 필치가 가히 亂步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영화 중에도 <배니싱 트윈>이라는 게 있는데, 본디 같은 부모를 공유하는 형제자매 사이에도 묘한 경쟁 심리, 이른바 sibling rivalry라는 게 존재합니다. 하물며 같은 태(胎)에서 성장한 쌍생아라면 혹여 복중에 나란히 붙어 지낼 당시 서로 싸운 적이 많았을 수도 있겠다... 이런 상상의 힘이 빚어낸 게 쌍둥이를 둘러싼 각종 괴담들입니다. 아마도 이 선집에 실린 첫째 작품 <쌍생아>는 이 분야의 끝판대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에 특유의 일본 한자 폰트로 ?生?라 쓴 모습마저 괴기스럽게 멋있습니다(제 기분 탓이겠죠?) 한국 정자체라면 雙生兒라고 써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1988년 이상문학상 공동수상작이 임철우 작 <붉은 방>이었는데, 물론 란포의 1925년작 <赤い部屋>이 훨씬 먼저이며, 내용도 판이합니다. 그러나 엄혹한 시국에 소신대로 행동하다 공안 당국에 끌려가 끔찍한 일을 당한 청년 역시도, 일종의 란포 세계에 살았는지 모를 일이긴 합니다. 이 선집에서는 p30 이하에 수록되었습니다. "셜록 홈즈도 알 수 없는 범죄"라는 구절이 있는데, 엄밀히 말해 실정법에 저촉되지 않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수 있는 비행(非行)과는 저게 다른 의미입니다. 셜록 홈즈는 미스테리의 실상을 밝히는 탐정이지, 누굴 잡아넣는 검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란포의 세계는 비틀리고, 기괴하고, 징그럽고, 비참한 이미지로 가득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사이에 아름다운 꽃이 핍니다. 실제로 그의 문체는 매우 퇴폐적이고 그러면서도 때로 청초하게 예쁩니다. "훅 달아오르는 태양의 열기가 길가에 늘어선 전신주들을 해초처럼 흔들고 있었다(p69. <백일몽>)" 아마도, 되다 만 범죄자, 이상성욕자, 무슨 맥주가 좋다는 둥 어설픈 허세를 부리는 정신착란자, 제 깜냥을 모르고 남들에게 이상한 영향력을 끼치려다 비참하게 고꾸라진 영혼의 퇴장을, 이처럼 적절하게 장식하는 멘트도 드물겠습니다.

사람이 그 얼굴을 바로 드러내지 않고 가면을 쓴다는 건 벌써 정직한 소통을 거부하겠다는 의도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정반대의 효과가 나기도 하며, 오히려 가면을 쓰고서 평소의 사회적 평판, 계급, 지위와는 무관하게, 상대를 블라인드 상태로 만들고 속에 있던 말을 털어놓게 하는 상황도 있는데 그게 바로 가면무도회입니다. 란포의 대표작 중 하나인 <가면무도회>에서는 인물들이 더 예외적이고 bizarre한 처지에 놓이는데... 젊은시절 란포는 레귤러한 가면무도회에 몇 번이나 참석해 봤을까요? 여튼 비범한 상상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편과 그녀의 온갖 속삭임을 엿들으며 얼마나 비참하고 슬펐는지 모릅니다(p225)" 엿듣는 행동이 장소와 자세라도 당당하면 그나마 마음의 위축됨이 덜할텐데, <사람이 아닌 슬픔>에서 화자가 숨어든 장소는 다름아닌 창고입니다. 잘못한 사람이 창고에 숨어들어 뭘 꾸민다 해도 자괴감이 들 것인데, 이건 원 피해자가 되레 어둠에 몸을 의탁하는 판이니... 장궤 안에서 발견된 인형은 차라리 미국 영화 Child's Play 시리즈에서처럼 끔찍한 저주의 상징이자 매개입니다.

젊은 처녀의 생기(p329)란 다 죽어가는 늙은이의 혈관에도 새로이 따끈한 피가 돌게 하는 마법의 물질입니다. <누름꽃과 여행하는 남자>에서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노인은 알고보니(p355) 에도가와 본인의 분신, 특별 출연이었지요. 그러고 보니 이 단편은 망명 헝가리 귀족 오르치 부인의 피조물 "구석의 노인" 시리즈를 살짝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아무튼 란포 유니버스 고유의 슬슬 썩어가는 변태미의 앙상블을 잘 연주한, 한국어판 이 선집을 유난히 더웠던 여름에 읽게 되어 행복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