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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쾌락 - YES24
어떤 욕망에도 흔들림 없이 살게 하는 ‘아타락시아’를 누리는 길국내 최초, 에피쿠로스의 현존 원고 전체 8편 그리스어 완역 에피쿠로스가 활동하던 시대는 제1-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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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교 교육 과정에서, 유럽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던 시기, 스토이시즘(=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양대 산맥이 철학사를 수놓았음을 배웠더랬습니다. 현대지성 출판사 고전 시리즈 중 벌써 47번째로 번역하여 펴낸 이 <에피쿠로스 철학>은, 말 그대로 이 학파의 개조이자 태두인 에피쿠로스의 현존하는 여러 저작들을 한 권에 묶은 것입니다.
모두 8장(章)으로 구성된 이 책 중 p6의 일러두기에 나오듯이 1장과 4장은 에피쿠로스가 아니라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솜씨입니다. 두 사람의 활동시기는 서로 상당히 차이가 나서, 에피쿠로스는 거의 헬레니즘 시대 소속인 반면 후자는 로마가 대혼란을 겪던 군인 황제 시대에 살았습니다. 둘의 시대 사이에는 일찍이 없던 패권국 로마가 나타나 유년, 청년기를 이미 다 거치고 중장년에 접어들었다고 보면 그 간극의 크기가 실감 날까요? 그러나 두 지성 모두 그리스어를 모어(母語)로 썼다는 점은 공통입니다.
현대지성 고전은 라틴어 원전, 또 헬라어 원전 그 상당수를 박문재 선생이 번역해 왔는데 이 책도 그렇습니다. 선생의 번역 작품 대부분이 그래왔듯이 이 책도 역주가 상당히 많아서 초보 독자들의 공부를 돕습니다. 며칠 전 한국 고전인문학계의 거두 천병희 선생이 타계하셔서 많은 고전 애호가들을 슬프게 했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박문재 선생님의 역량도 천 교수님 실력에 진배없다고 평가하며 특히 원전이 라틴어일 때는 오히려 더 명료하고 논리적이시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갖
앞서 말한 대로 1장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쓴 에피쿠로스 소평전입니다. 글을 읽어 보면 두 저자의 서로 떨어진 시대 간극이 완연히 실감되는 게, 서술 태도가 철저히 객관화한 게 마치 동중서가 공자를 논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시대에는 이미 에피쿠로스 등 고전 철학자에 대해 논의와 연구가 이뤄질 만큼 이뤄졌으며 그 논변의 행로가 거리낄 바가 없을 정도입니다.
에피쿠로스뿐 아니라 철학자 상당수가 처음에는 문법학자(p13) 출신으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고전어는 본디 정확한 구사 자체가 까다로우며 문장의 정격 전개 자체가 이미 우수한 두뇌의 증명입니다. 그라니 대철학자의 첫번 관심사가 문법임은 당연한 경향입니다. 초기 에피쿠로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가 데모크리토스이며 우리가 원자론의 선구로 배운 바로 그 철학자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도 시대 간격이 제법 크게 나므로 서로 얼굴을 마주하거나 한 일은 없습니다.
에피쿠로스가 논한 쾌락은 소양 없는 현대인들이 오해하는 바와 크게 달리, 물질적이고 말초적인 쾌락 추구가 결코 아닙니다(p194). 하지만 특유의 발랄함과 자유분방함이 배어 있는데 이는 에피쿠로스 본인의 그런 개성에서 기인하는 바 큽니다. 이 책 p18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보십시오.
"플라톤의 제자들은 디오니시오스(당대의 참주, 독재자)에게 아부하는 자들."
"플라톤은 황금 인간"
"아리스토텔레스는 (부친의 재산을 함부로 굴린) 방탕아"
만약 중국에서 유가의 비조인 공맹(孔孟)에 대해 이처럼이나 험악한 막말을 쏟아부은 이가 있었다면 그 제자백가 일파는 후세에 문헌을 남기기 어려울 만큼 심한 박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시대부터 지중해 유럽은 스토아적 금욕주의나 초기 기독교의 엄숙주의가 체제의 중핵부로부터 후원, 선호를 얻는 추세였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지적이고 발랄한 풍자와 해학이 돋보이는 에피쿠로스적 정신이 사회의 건강성과 지적 유연성 유지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p39의 박 선생 역주를 보면 심지어 선과 악을 논할 때에도 에피쿠로스적 맥락은 이를 윤리적 관점에서만 파악해서는 안 된다고 섬세히 알려 줍니다.
고대 철학자들이 남긴 저작 중 상당수는 서신의 형태이며 2장은 우리가 잘 아는 그 역사가는 아닙니다. 에피쿠로스가 태어나기도 전에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미 몰(歿)했죠. p44의 역주 71번을 보면 박문재 선생은 말(言)의 여러 층위를 구별해서 독자에게 가르칩니다. 프통고스는 선개념을 유형적으로 표현한 표상이며, 포네는 명제이며 저 프통고스들이 모이고 모여 이뤄지는 상위 범주라는 뜻이겠습니다. 프통고스는 φθογγο?라 씁니다. 감마(γ)가 저렇게 두 번 겹치면 연구개 비음인 [ŋ] 소리가 나며 p53의 역주 93번에 등장하는 옹코스(ογκο?)도 비슷한 경우입니다.
말초적 쾌락에 빠져 오히려 장기적이고 근원적인 마음의 균형과 기쁨을 잃지 말라는 단호한 가르침은 p95에서도 다시 확인됩니다. 작고 하찮은 쾌감에만 몸을 맡겨 완전한 어리석음에 빠져드는 건 짐승조차도 저지르지 않는 실수라는 건데, 오늘날 우리들이 각종 변태적인 성적 쾌감을 좇거나, 심지어 향정신성 약물에까지 의존, 중독되는 경향에 대해 이 위대한 스승인 에피쿠로스가 과연 뭐라고 꾸짖을지 상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자족의 가장 큰 열매는 자유(p149)라는 그의 일갈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길 때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덕목의 경중을 가리는 참된 지혜를 발휘할 수 있겠습니다.
*온라인 서점 YES24 리뷰어클럽에서 책을 제공받고, 작성자의 느낌과 생각에 따라 작성한 리뷰입니다.